도쿄 올림픽이 끝났다. 세세한 건 모두 미뤄두고, 이번 올림픽의 가장 큰 성과는 '운동하는 여성들'의 발굴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전까지 운동하는 여성들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태초부터 존재했으나 드러나지 않았고 존재를 인식할 수도 없었다. 혹은 남성으로 패싱되어 여성성을 갖추지 못한 것에 대한 조롱거리가 되는 일도 잦았다. 우리는 활자 그대로 ...
파도를 굉장히 좋아한다. 찬란한 색을 가진 물결이 한 번에 밀려왔다가 하얗게 부서지고 멀어지며 낭식하는 그런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파도가 좋은 이유는, 그 단어가 가진 중의적인 뜻 때문이기도 하다. 파도를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첫 번째로 '바다에 이는 물결'이라는 뜻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아래 내가 파도를 필연적으로 사랑할 ...
평소와는 달리 침울해 보여서 걱정하던 일행은 하나둘씩 다가와 에이카의 곁에 모여들었다. 에이카는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아일든이 그에게 업히듯 등에 매달렸고, 에이카가 휘청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일든?” 위로하는 데에 재주가 없는 아일든은 그저 에이카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며 씩 웃었다. 리치에는 에이카의 옆에 딱 붙어 앉았다. 그의 웅크린 자...
지식을 가득 담고 있거나 여러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들도 좋지만, 가끔은 그냥 뇌를 빼놓고도 볼 수 있는 그런 책을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보통 현생이 힘들면 그 주기가 돌아오는 듯하다. 다만, 현생이 힘들다는 것은 보통 바쁘거나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거고, 반면에 그런 책들은 대부분 킬링 타임 용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다가는 남는 건...
간만에 몇 년 전 usb를 노트북에 꽂았다. 몇 년 전 쓰던 소설들이 가득 모여있는 USB는 여러 파일로 난잡했다. 하나둘, 세어보니 이름이 붙여진 시놉시스만 해도 12개였다. 물론 이제는 쓸 수 없는 것들이지만. 아주 어릴 때는 직접 연필로 그림과 글을 쓴 종이를 쫄대 파일에 꽂아 동화책을 만들었었다. 제목은 산이 너무 좋아요. 대충 등산 가는 게 너무 ...
엄마가 핸드폰을 내게 들이밉니다. 화면에는 사진이 있어요. 아직 어린이집을 다니는 늦둥이 남동생의 사진이요. 요새 어린이집에서는 매일 사진을 찍어서 어플에 올려주더군요. '귀엽네.' 하며 사진을 흘깃 보던 내 시선이 의아하게 멈추어섭니다. 그 광경은 정말 이상했어요. 짝지은 6명의 여남 아이들이 있었는데, 여자아이들 머리 위에는 분홍색 베일이 씌워져있습니다...
“고요하네. 원래 이래?” “기민한 동물들이 서식지를 버리고 도망갔으니까.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새들이 먼저 날아가는 것처럼?” “아, 그렇네.” 에이카가 아일든에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긴장한 채로 경계를 넘었으나, 숲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신발과 흙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적막하게 울렸다. 여름의 초록 숲들의 나뭇잎들이 바람에 부딪히며 흔들렸...
앞 이야기 다 잊어버리셨을 것 같아서... ~이때까지 이야기 줄거리~ 철저한 가부장제 로판 세계관에서 갑자기 남자가 사라졌다. 유일한 황족이 된 아리엔타 쿼트라는 황제로 즉위하고 검술을 남몰래 연습하던 에이카는 황제의 호위기사로 발탁된다. 여성 수용소에서 갇혀 지내던 소체는 자유를 되찾고 백작 부인으로 내조를 하며 살아가던 미셸라 멘타사는 멘타사 백작이 된...
달과 6펜스-심규선 함께 감상을 추천드립니다. 7월 6일. 사절단 행렬은 짧은 휴식을 마치고 다시 출발했다. 진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미동도 없이 마차에 앉아 있었다. 호아가 갈아입을 옷과 음식을 계속 가져다주었으나, 계속 맥이 빠졌다. 무언가를 먹으면 그 즉시 게워내는 바람에 무엇을 먹을 수도 없었다. 진서가 거절한 음식이 담긴 쟁반을 다시 하인의 손...
7월 4일. 화려하게 치장한 기다란 행렬이 서나라 황궁 앞에 길게 늘어섰다. 모든 일정을 끝마친 은나라의 외교 사절단이 돌아가는 날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부에 있는 커다랗고 화려한 마차에는 호아와 진서가 타고 있었다. “흠. 좁네.” 호아가 중얼거렸다. 아무리 마차가 커도 1인용은 1인용이었다. 게다가 한쪽에만 긴 의자가 있어서, 호아와 진서는 나란히...
읽기 전에. -여성이 디폴트이며 여성이 황제, 황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세계관입니다. 모든 등장인물이 여성입니다. '그녀' 대신 '그'를 사용합니다. 동화는 언제나 해피엔딩이다. 그 불변의 법칙은 결코 깨지지 않는다. 너와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너와 나의 이야기가 동화가 될 수 있을까. * “7월 7일은 어쩔 수 없이 헤어졌던 연인이 다시 만날 수 있...
전원 남자인 사제들과 한 명의 성녀로 이루어진 집단, 신전. 신의 가호를 받아 치유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그들은 주기적으로 제국을 순회하며 봉사 활동을 펼치곤 했다. 하지만 아직 이번 세대의 ‘성녀’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전은 텅 비어있는 상태였다. 아무나 사제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체질적으로 타고난 자들만이 사제라는 영광의 자리에 설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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